설교자 | 안진섭 목사 | 본문 | 요한복음 19:31-42 |
조회수 | 176 | 설교일 | 2017-04-15 |
작성자 | 정준화 | 작성일 | 2017-04-19 16:05:53 |
2017 4 15 새벽예배 |
예수의 십자가가 변화시킨 사람들(요한복음 19:31-42)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당시의 날짜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금요일에 돌아가셨으므로 지금 이 시간에는 무덤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그 시간에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두 그룹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 그룹은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그룹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1. 여전히 어두움에 매어있는 유대인들(31절)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엇보다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이 되기 전에 예수님과 두 죄수의 시체를 빨리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죄수들의 시체를 안식일에 그대로 두는 것은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죽게 하려고 다리를 꺾어서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원래 쉽게 죽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아주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갑니다. 그런데 안식일 전에 치우기 위해 빨리 다리를 꺾어서 치워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당시에 다리를 꺾을 때는 일반적으로 커다란 쇠망치로 다리를 때려서 부러뜨렸습니다. 두 죄수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망치로 다리를 때려서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고 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에 매어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고한 자이신 예수님을, 그것도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인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시체를 빨리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는 더러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시체만을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종종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정말로 더럽게 생각해야 할 우리의 내면은 생각하지 못하고 외형적인 모습만 깨끗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런 시각으로 다른 이를 정죄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또 다른 유대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2. 십자가로 인하여 변화된 공회원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38-42절) 38-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 말씀에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요셉이고 또 한 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두 사람 다 공회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한 기구입니다. 이 두 사람은 그 공회에 속해있던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다만 자신의 신분을 잃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믿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이런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롭게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이 변화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요구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통 죄수의 시체는 가족들과 함께 매장할 수가 없었고 범죄자를 위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가 그런 곳에 매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용기를 내어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드러내놓고 믿은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용기와 확신이 이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를 세 번 만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찾아와서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고, 또 한 번은 7:50에서 바리새인들이 대화할 때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본문 39절을 주의해서 보시면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니고데모는 문자 그대로 밤에 예수님께 왔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아주 의미가 깊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영적 어두움의 상징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나아왔던 자입니다. 영적인 어두움에 빠져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이 기록은 이제 니고데모가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어둠과 무지에 속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니고데모는 더 이상 밤에 속한 자도 아니고, 산헤드린의 회원도 아닙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향품의 양은 거의 왕의 장례식에 쓰는 정도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예수님이 참된 왕이요 메시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전에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지만 이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예수님께 속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자신들의 세상적인 지위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겼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잃을 각오를 하고 드러내어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당할 불이익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십시오. 특별히 드러냈을 때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용기를 내어 드러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시인하리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 자가 부활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어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십시오. 불이익을 준다면 당하십시오. 우리 주님처럼 자기희생과 섬김의 자세로 그 불이익을 감수하십시오.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들과 연대하십시오. 그들과 연대하면 그들이 당하는 불이익을 우리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난에 동참하는 것도 역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방식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동참하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부활의 영광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 동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고난당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자가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영광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