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안진섭 목사 본문 마태복음 1:18-25
조회수 912 설교일 2017-09-17
작성자 박경진 작성일 2017-09-18 13:10:1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복음 1:18-25)

 

서론 – 구약과 신약의 관계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과 신약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이 바로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실제로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학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심지어 신학자들 가운데도 이런 주장을 펼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나 주장은 신구약성경의 관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신약의 하나님도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구약시대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시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시대 백성들도 메시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신약시대 백성들도 메시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약 백성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고, 신약 백성들은 오신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프레임이 바로 “약속과 성취”라는 개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서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그 약속된 메시아가 이제 오셨다는 성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백성들은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신약 백성들은 그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로 이 ‘약속과 성취’라는 이 구조를 잘 알고 적용해야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도 역시 약속과 성취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그 시작부터 구약을 대표하는 두 인물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소개합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의 족보를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1. 오늘 본문의 의미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정혼하면 법적으로 부부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할 때까지 동거하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정혼한 후 1년 정도의 기간을 보내고 나서 정식으로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한 것입니다. 요셉은 매우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만약 이 문제를 드러내면 마리아는 부도덕한 여자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일을 가급적 조용히 처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계시합니다.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게 합니다. 우리 본문 2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입니다. 풀어 말하면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본문 22-23절은 이 모든 일이 다 구약의 선지서에 약속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본문 22-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3절의 말씀은 구약의 이사야 7:14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 처음 등장하는 공식적인 인용어구입니다. 이 구절에도 약속과 성취의 개념이 잘 나타납니다. 구약의 약속이 신약에서 성취되었습니다.

 

2. 이사야 7:10-17에 비추어 본 마태복음 1:23의 의미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만 보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는 이 말씀의 출처인 구약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우리 이사야 7:10-17을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0.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17.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유다에게도 동맹에 참여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과 동맹을 맺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연합군을 이루어 남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유다의 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징조를 구하면 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여러 차례 자신이 유다의 구원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아니라 아시리아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유다를 보호할 징조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징조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왜 아하스는 징조를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이사야 7:12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아하스는 자신이 징조를 구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한 것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시험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아하스를 참된 믿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아시리아를 더욱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경건한 이유를 대고 있지만 실상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아시리아를 더욱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7:13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여기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말은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의 것을 빼앗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하나님마저 괴롭게 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지금 아하스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나님까지 괴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이사야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에서 인용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 이사야 7:14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 징조는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나온 ‘처녀’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나온 처녀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알마’라고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단어가 처녀 외에도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단어를 근거로 동정녀 탄생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이 단어가 단순히 누군가의 아내가 된 젊은 여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인 혹은 아내를 뜻하는 보다 일반적인 단어인 ‘이샤’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다 일반적인 단어인 이샤를 쓰지 않고 굳이 알마를 쓴 것을 볼 때 이 단어가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창세기 24장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런 해석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24:14을 보겠습니다.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여기서 소녀라는 단어는 단순히 여성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입니다. 이 소녀는 나중에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를 가리킵니다. 이때는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의 정체를 잘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단순히 ‘여자’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4:43로 가면 동일하게 리브가를 가리키는데 단어가 바뀝니다. 우리 창세기 24:43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이 말은 리브가가 누구인지 알게 된 이후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젊은 여자가 바로 ‘알마’입니다. 리브가가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알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이사야에 나온 알마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은 이 알마를 ‘파르테노스’라는 헬라어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파르테노스’는 정확히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70인역은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전에 번역된 헬라어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 70인역 성경에서도 여기에 나온 알마를 처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바로 그 70인역을 참고하여 ‘파르테노스’ 곧 처녀라고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알마’나 마태복음에 기록된 ‘파르테노스’는 둘 다 처녀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은 여기에 나온 아들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에서 말하는 아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아니고 아하스 당대에 대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두 주장보다 더욱 합당한 해석은 이 구절이 소위 예언의 이중적 성취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은 이중적으로 성취될 때가 많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당대를 향한 예언이라서 당대에 성취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예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보는 것을 예언의 이중적 성취라고 합니다.

  이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당대에 유다와 함께 하여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지만 예언의 이중적 성취라는 관점으로 보면 이 예언은 메시아 예언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메시아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매우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사무엘하 7:16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씀은 다윗의 후손의 왕위가 영원히 보전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은 시편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시편 2:6-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은 거룩한 산 시온에 왕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 시편 45:6-7을 보겠습니다.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7.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이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왕에게 신적 권위를 돌립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에 나타나는 왕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예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구약성경에는 메시아 예언이 매우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은 이런 말씀들을 한결같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메시아 예언으로 이해합니다. 우리 히브리서 1:8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시편 45:6을 인용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시편의 예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말씀들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23에 나오는 아들을 예수님을 가리키는 메시아 예언으로 보는 것은 매우 적절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약속이 어떤 약속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약속을 성취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암울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었고, 종교적으로도 타락하여 사회 전체가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있었지만 도대체 언제 그 소망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메시아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아기 예수로 성육신하여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세기에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이후 성령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신자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성령을 모신 자가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십니다. 이 땅에 믿는 자들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 교회의 머리로 존재하십니다.

  창조부터 지금까지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메시아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또 한 가지 약속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반드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요한계시록 1:8을 같이 보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여기서 장차 올 자라는 말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2:20-21을 같이 보겠습니다. “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증언을 마치면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주시겠다는 요한복음의 약속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에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약속, 곧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약속을 관통하는 중요한 핵심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까?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연합군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연합군 따위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아하스가 두려워하는 진짜 원인은 연합군의 공격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매우 두려웠을 것입니다. 정혼한 아내와 아직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요셉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성도들은 무서운 핍박 중에 있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실한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속히 다시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줄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십시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일마다 때마다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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