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안진섭목사 | ||
조회수 | 231 | ||
작성일 | 2008-10-27 00:00:00 |
사도신경 강해6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습니다 |
2008년 10월 26일 주일예배
설교자: 안진섭 목사 <사도신경강해> 제6강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습니다 (개역개정판, 베드로전서 2:18-25) 오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에 대해서 살펴볼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널리 사랑받는 아름다운 상징이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십자가로 목걸이를 만들어 착용합니다. 교회 종탑에 걸린 십자가는 이제 너무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누구나 거부감없이 볼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본래 고대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비극적인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이 로마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형은 이집트, 페니키아, 카르타고, 페르시아, 아시리아, 인도, 그리스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사형 방식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의 사형 방식은 목매다는 것(민 25:4), 불살라 죽이는 것(레 20:14), 돌로 쳐 죽이는 것(레 20:27) 등입니다. 십자가 형과 관련있는 유대인들의 사형 방법은 사람을 죽인 후에 나무에 매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어서 나무에 매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반드시 밤에 나무에 달린 자를 끌어내려 땅에 묻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아주 무섭고 수치스러운 사형틀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 형은 주로 정치범이나 반사회적인 범죄자에게만 집행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공식적으로는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정치범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을 당한 것입니다. 십자가 형이 이렇게 비극적인 사형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여성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여성이 교수형에 사용하는 밧줄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거나, 혹은 단두대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면 얼마나 이상하겠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그와 유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틀 이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상징입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를 나는 자랑하노라”라고 노래했던 어느 찬송가 작사가처럼 우리도 자랑하고 싶은 아름답고 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가 이렇게 백팔십도 바뀌었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십자가는 비극적인 사형틀에서 아름다운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일반적인 십자가 형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연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사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원전 4년경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서기 1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당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년도를 잘못 추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기원전 4년 경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약 30세가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몹시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회의를 열어서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의논하고 예수님을 결박하여 당시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형당할만한 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민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진리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택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총독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모진 고문과 온갖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고문으로 완전히 탈진한 몸이 되어 예수님은 자신이 매달릴 그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행진하셨습니다. 그 행진은 인류 역사에 있었던 여러 행진 가운데 가장 끔찍한 행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쳐 쓰러졌을 때, 그 옆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기도 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겉옷은 네 조각으로 찢어졌고, 결국 예수님은 아침 9시 경에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마치 악을 행한 강도 중에 한 명인 것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사람들은 희롱할 목적으로 그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라틴어, 아람어, 그리스어, 3개 국어로 써 붙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지나가던 사람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 그리고 그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에 의해서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립니다.”라고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 가운데는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만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예수를 아는 이들이 여인들과 함께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그 중에 유일하게 요한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자들로부터 버림받은 한 인간의 처참한 죽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았고, 민중들에게도 버림받았으며, 제자들에게도 버림받았고, 결국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토록 철저하게 버림받은 죽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으로 재구성해 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 자체입니다. 오늘날 일부의 과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실존인물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역사 속에 존재했으며, 로마제국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2.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베드로전서 2:18-2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2:18-25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최측근에 있었던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류했던 제자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합니다. 1) 모본 -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모본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이교 통치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치욕을 참고 인내하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억울한 일을 참고 인내한 모델로 우리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베드로전서 2:21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일평생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향해 보복한 적도 없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상대를 위협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오직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본”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본래 그 단어는 학생이 글씨쓰기를 배울 때, 흉내낼 수 있는 선생의 완전한 필체를 의미합니다. 제일 좋은 교육방법은 완전한 모델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고 그대로 베껴 써야 할 가장 완전한 필체입니다. 그 분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완전한 모본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그런 모본으로 제시하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님에게 주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던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체포되었을 때,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습니다. 그 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받아 일생동안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 교회의 예배당에 걸려 있는 이 십자가를 볼 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십자가는 철조망으로 만든 십자가입니다. 왜 우리가 철조망으로 만든 십자가를 걸었습니까? 왜 아름답게 장식된 십자가가 아니라 이토록 거친 십자가를 걸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험한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순종함으로 걸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께서 걸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셨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할지라도 그들은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신부는 본래 독서를 즐기던 사색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교로 부임했을 때, 자기 관할 지역에서 벌어지는 악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로메로 신부는 백성들과 관리들을 향하여 정의와 사랑을 외쳤습니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군부 독재 상황이었습니다. 군부 독재 상황에서 정부를 비판하고 민중의 편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참하게 죽어가는 민중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사랑을 외쳤습니다. 결국 로메로 신부는 암살당했습니다. 로메로 신부는 왜 그런 위험한 길을 걸었을까요? 로메로 신부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비록 고난을 당할지라도 스승이 걸었던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투쟁적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독서를 좋아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 그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모본입니다. 핍박받아도 물리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여도 참고 인내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훌륭한 모본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불의한 고난을 참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담긴 첫 번째 의미입니다. 2) 대속 - 십자가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대속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대속이라는 말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속의 교리에 대해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훌륭한 모본만은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모델이기만 하다면 우리는 사실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는 예수님처럼 의로운 죽음을 당한 자가 간혹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마가복음 10:45을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인간에게는 죄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인간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 분의 죽음은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마가복음 10:45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속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는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이 그 벌을 대신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도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미는 내가 지은 죄를 그 짐승이 대신 받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치명적인 죄라서 아무나 그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무 죄가 없는 존재만이 그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불완전한 제물인 짐승을 드렸기 때문에 끊임없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제물이시므로 단번에 영원토록 효력이 있는 완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십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위대한 모델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분명히 인류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모본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모본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위대한 모본이 우리의 죄를 제거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제거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을 같이 읽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죄인들의 처형 장소인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3.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합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그 험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품으셨습니다. 아니 그 분 자신이 곧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야말로 그 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면 그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구원받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신앙고백이 무엇이기에 그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까? 제가 말하는 고백은 단순히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심정을 깨달아 그 주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참된 고백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에 근거하여 믿음의 고백을 드리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십니다. 그런 주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받고 의로운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21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4.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믿을 때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시작됩니까? 갈라디아서 2:20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전까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악한 죄성을 깨닫고 보니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고 했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자신의 옛 사람이 못 박힐 때, 이제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옛 자아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나의 도덕적인 행위로 의롭게 살 수 있다는 생각, 이 정도면 의롭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 그런 모든 잘못된 생각들, 모든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믿을 때, 우리의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십자가를 깊이 체험할 때 시작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깊이 만날 때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체험하면 자신의 악한 죄 때문에 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에 비하여 한없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는 그 엄청난 사실 앞에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역시 그 사랑을 체험하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나같이 사랑이 부족한 자도 내 자녀가 다치면 가슴이 그토록 아픈데 나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목이 메어 옵니다. 사람의 변화가 언제 시작됩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깊이 만날 때 시작됩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의 깊이를 경험할 때 시작됩니다. 그 사랑을 통하여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비로소 내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 때부터 내 삶의 변화는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사시는 주님께서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산다고 해도 나는 이전처럼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과 내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다만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십니까? 요즘 삶의 기쁨이 없습니까? 삶에 변화가 없습니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삶의 기쁨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때우듯 살고 계십니까? 주님의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도 별로 감격이 없이 마지못해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최근에 십자가의 감격으로 울어 본 적이 언제입니까?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찬송을 부르다가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예전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기쁨과 감격 가운데 신앙 생활했던 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궁핍하던 시절에도 늘 기뻐하면서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울 때도 감사하며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지금 그런 감격이 없다면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의 감격이 회복될 때, 우리 삶의 회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회복될 때,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회복될 때, 봉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이 참된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