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안진섭목사
조회수 419
작성일 2010-10-11 00:00:00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합니다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합니다(요한복음 1:15-18)

여러분이 지금 큰 배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멋진 상상입니까? 타이태닉의 주인공처럼 배의 갑판에 서서 아름다운 바다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장이 안내방송을 합니다. “배가 암초에 부딪쳐서 침몰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구명보트를 준비했습니다. 구명보트를 이용하여 탈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구명보트일 것입니다. 다른 것을 찾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구명보트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가족들과 함께 전세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 엔진이 화염에 휩싸이고 조종사가 조종석에서 뛰쳐나와 긴급 상황을 알립니다. “비행기가 곧 추락합니다. 낙하산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승객들은 조종사가 비행기 문을 여는 동안 일렬로 줄을 섭니다. 조종사는 승객들의 등을 문 바깥쪽으로 밀어냅니다. 그런데 어떤 승객은 낙하용 보호 안경을, 또 어떤 승객은 낙하용 장화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조종사는 승객들을 한 사람씩 공중으로 밀어내며 소리칩니다. “여러분에게 낙하산을 하나씩 드리지 않았습니까? 탈출하는 데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데는 구명보트면 충분합니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하는데는 낙하산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면 충분할까요?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1장 1절부터 시작하여 계속 예수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예수님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비서가 전화를 해서 설교제목을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비서가 묻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그 교회에 설교하러 가서 주보를 보았습니다. 주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은 계속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오직 예수로만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예수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오직 예수로만 충분합니까?

1. 16절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 구절은 14절에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15절에 있는 침례요한의 증거는 괄호로 처리하는 것이 맞습니다. 앞에서 나왔던 침례요한의 증언을 다시 한 번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14절에서 16절로 이어집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충만하심으로부터 은혜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부분에 있는 “그 분의 충만하심으로부터”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충만하심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위에 은혜러라, 라는 말은 고민이 필요한 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은혜가 파도처럼 연이어 오는 것을 표현한 말처럼 보입니다. 은혜 위에 또 은혜이다, 혹은 은혜 다음에 또 은혜다, 그런 말처럼 보입니다. 이런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문맥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17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말씀은 율법과 은혜/진리를 대조합니다. 또한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16절에 있는 은혜 위에 은혜는 17절에 있는 이 대조와 연결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결하여 해석하면 앞에 있는 은혜는 모세를 통해서 받은 율법을 가리키고, 뒤에 있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가리킵니다.

모세의 율법도 분명히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아래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광야 길을 방황하던 중에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을 바른 기초위에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면 아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도 분명히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은혜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온 은혜는 너무 크고 놀라워서 앞에 있는 은혜를 완전히 대치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은혜위에 은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율법에 기반하여 복음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율법과 복음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히 극복하고 복음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율법과 복음은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연속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해석할 수 있고, 불연속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계시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불완전한 은혜입니다. 일종의 과도기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은혜 대신에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완전히 대신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주신 은혜를 대치하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자로 우리 가운데 오신 그 분만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2. 이제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후반부에 보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진리라는 두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진리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8:32에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은혜로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육체로 오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진리가 은혜로 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은혜와 진리는 상호보완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반드시 은혜로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임하는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없는 진리는 우리를 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듭니다. 반대로 진리가 없는 은혜는 우리를 방종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받았습니다. 은혜만 받은 것도 아니고 진리만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함께 받았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만으로 충분합니까? 이제 세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구약을 아는 사람에게는 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4:10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 말씀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을까요? 출애굽기 33:20을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33:23을 계속 보겠습니다.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모세를 대면하였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만 등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도 너무 밝아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거든 하물며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다릅니다. 신약시대에는 누구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성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18절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은 독생하신 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왜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낯선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진정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빌립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인간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예수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그 예수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예수님 외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침례요한도 예수님의 선재를 증거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 보다 앞선 것은 나 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침례요한은 분명히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자신보다 먼저 계시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떠받들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영원부터 존재하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를 추종하고 모세를 영웅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른 신앙이었을까요? 구약성경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위대한 영웅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400년 이상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기 백성들을 출애굽시켰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자기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느보산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4:7을 보면 모세가 죽을 때 120세였지만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를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죽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40년간의 긴 광야생활 동안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돌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조차 모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모세의 무덤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조용히 감추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뒤로 조용히 사라진 모세를 억지로 끄집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낸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제공한 자로 떠받들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유대교를 망쳤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율법주의에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돈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고 했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는 없거니와 은과 금을 네게 준다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황금을 함께 숭배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명예와 권력 등 세속적인 가치들을 함께 섬깁니다.

아니 굳이 한국교회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십니까?

미국의 백인교회에서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그런 도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내 자녀가 믿지 않는 백인과 믿음이 좋은 흑인 중에서 결혼상대자를 택해야 한다면 누구와 결혼시키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믿지 않는 백인을 택할 것입니다.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불신자와 성공하지 못한 신자 가운데 결혼상대자를 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제가 정답을 압니다. “예, 크게 성공한 신자를 택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 분, 그 분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자주 사람을 높이고 싶어합니다.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가운데 한 가지가 스타 마케팅입니다. 스타를 내세워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스타 목사를 내세워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연예인들을 내세워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스타 운동선수를 내세워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스타 마케팅이 한국교회에 성행합니다. 그런 스타 마케팅은 실제로 가시적인 성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스타가 무너지면 한국교회도 덩달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무수히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런 식의 스타마케팅을 좋아합니다.

스타마케팅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 스타가 예수를 가린다는 것입니다. 스타마케팅을 활용한다는 것은 예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스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스타가 누구입니까? Jesus Christ Super Star!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스타가 아닙니까?

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어야 합니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이 흥할 때 망해야 합니다. 율법은 예수님에게 그 길을 비켜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가 드러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이 주목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로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삶을 추구합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예수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합니다. 중세기 교회는 돈과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교황을 신격화하고 사제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로만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로만 만족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이용하여 돈과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를 잃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만 알면 방종하게 되니 율법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안에는 은혜만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를 강조했다가 방종에 빠졌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하박국 선지자는 이미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박국 3:17-18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가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율법을 넘어서는 참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목록으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