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안진섭목사
조회수 327
작성일 2011-02-07 00:00:00
영생과 진노
2011년 2월 6일 주일예배 2부 설교 녹음

영생과 진노(요한복음 3:31-36)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전 세계적으로 3000만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에 초판이 출판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입니다. 그 책에서 릭 워렌이 주장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여 보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출판된 후, 그 책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강해설교자 존 맥아더 목사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 주는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목적이 이끄는 삶은 결코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회개’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존 맥아더의 주장은 사실입니다. 릭 워렌의 책에는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회개에 대한 촉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릭 워렌에 대한 존 맥아더의 비판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릭 워렌의 책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서 존 맥아더의 비판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만약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담은 책이라고 분류한다면 존 맥아더의 말대로 릭 워렌의 책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회개’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릭 워렌의 책을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른 목적을 알고 살라고 가르치는 경건서적 정도로 이해한다면 릭 워렌의 책은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이런 논쟁은 미국교회에 존재하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논쟁의 일부입니다. 1980년대에 미국교회에서 교회성장학이라는 신학이 등장하였습니다. 교회성장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성장할 것인가를 세속 학문을 빌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영학이나 심리학, 혹은 통계학 등을 활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성장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와 같은 부정적인 내용들을 다루지 말고 오로지 말씀대로 살면 번영하고 형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그런 신학을 받아들여서 크게 성장한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편 미국교회의 일각에서는 그런 움직임에 대해 예언자적인 심정을 가지고 비판하는 그룹도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들이 존 맥아더와 존 파이퍼 등입니다. 교회성장학자들이 경영학적 기법을 도입하여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했다면, 존 맥아더나 존 파이퍼는 철저히 신학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설교했습니다. 존 맥아더나 존 파이퍼는 죄 문제를 끊임없이 설교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인 존재인지를 지속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교회성장학의 입장을 수용하여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번영의 신학에 기초하여 설교한 설교자들의 설교는 쉽고 단순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최근에는 파산위기를 겪고 있지만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가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현재 미국교회에서 그런 번영의 신학을 설교하여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선두주자는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책 역시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전하는 교양서적으로 이해한다면 유익한 면이 많은 책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책을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복음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이해한다면 그 책은 문제가 심각한 책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는 번영의 신학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번영의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느낌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증오입니다.” 존 파이퍼가 그렇게까지 번영의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왜곡은 복음을 아예 반대하는 것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외부에서 공격한다면,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내부로부터 허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항상 내부에 있었습니다. 기독교계의 내부에서 거짓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는 그 힘을 잃어버리고 무너지곤 했습니다. 중세기 로마 카톨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분명히 소망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에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부터의 회개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다루고 죄에서 돌이키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요한복음 20:31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이름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분명히 기독교의 복음은 소망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향하여 성경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참되고 영원한 소망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 다시 말해서 죄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소망에 대한 약속과 아울러 저주에 대한 경고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그 두 가지 메시지를 균형있게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3장까지를 결론짓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4장부터는 예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을 치유하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시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시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 등이 4장 이후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4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3장을 마무리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3:36입니다. 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금주의 암송구절이기도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에는 중요한 대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는 자와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의 대조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 이 대조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혹은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대조해야 정확한 대조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 대조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와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를 대조합니다. 왜 그렇게 대조할까요? 믿는다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는다는 단어는 오직 한 번 이 곳에서만 등장합니다. 왜 굳이 전혀 사용하지 않던 단어를 사용하여 대조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믿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따르면 믿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지 않는 것은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몰라서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란 의지적인 반역입니다. 로마서 1:28은 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로마서 1:32은 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정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죄란 이와같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지 않는 것, 곧 불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은 믿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를 대조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과 하나님의 진노는 완전히 극단적인 대조입니다. 영생이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시간적인 차원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 만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질적인 차원에서 새롭고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던 죄악된 생명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분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삶을 지금 시작하여 영원토록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런 영생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그런 영생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생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은 지옥에 빠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위험천만한 상황들을 잘 보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곳은 거대한 진노의 용광로이며, 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넓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보다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습니다.”

존 파이퍼는 지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옥의 진리를 반드시 느껴야 합니다. 지옥은 존재하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끔찍하며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라는 것을 반드시 느껴야 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들어가리라(마 25:46). 내가 불못(계 20:15)과 풀부불(마 13:42)을 상징으로 보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징이 실체에 대한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라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옥이 그다지 힘든 곳은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러한 그림들을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존 파이퍼,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 187).”

조나단 에드워드나 존 파이퍼가 성도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이런 설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이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분들이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어서 이런 설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설교한 이유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런 무서운 진노 아래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섭게 강조한 조나단 에드워드가 같은 설교에서 한 말을 보면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특별한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큰 소리로 불쌍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로 모인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밀려 들어가는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동서남북 천지 사방으로부터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처해있던 것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빠져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신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지금은 아주 행복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죄를 씻음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저도 동일한 심정으로 이 설교를 합니다. 그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하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 설교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적으로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영생을 보지 못합니다. 도리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의지적인 거역을 중단하시고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을 믿고 영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그 아들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가장 독선적인 말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을 알면서도 저는 동일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선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진리를 타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왜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과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처한 곤경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지금처럼 이렇게 악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인간은 그 빛나는 지성으로 지금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인간이 처한 곤경은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자는 반드시 외부에서 임해야 합니다. 또 다른 한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을 구원할 자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인간의 고통을 깊이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저 멀리에 계신 신이라면 그 분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과연 그 분이 어떤 분이기에 오직 그 분을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분입니다. 위로부터 오신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는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그 말은 곧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34절에서는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곧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31절을 보면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의 대조가 나옵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늘에 속한 자만이 하늘에 속한 말을 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참된 진리의 말씀은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할 진리의 말씀은 오직 하늘에서 옵니다. 영생은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죄인이 무슨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늘에 속한 자, 곧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오직 예수만 말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말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자도 인간이고, 그도 역시 땅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이라고 해도 사람의 말은 결국 땅에 속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예수만 말해야 합니다. 왜 침례요한이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 자신도 역시 땅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에 속한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왜 오늘날 한국교회가 복음에서 벗어나고 있습니까?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예수의 말보다 귀를 즐겁게 하는 사람의 말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도 겸손해야 합니다. 설교자도 역시 땅에 속한 자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인 예수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는 흥해야 하고 저는 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참된 영생의 말씀이 이 강단에서 선포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므로 그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이유가 좀 더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말씀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언뜻 이 말씀을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어떤 능력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물건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인격이십니다. 그 분에게서 능력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 자신은 분명히 인격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성령님은 계속 예수님 안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온전히 충만하게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라는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은 분명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려면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3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성령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여 모든 권세를 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물을 다 그의 아들의 손에 주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면 벌벌 떠는 쫀쫀한 남자도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 여자를 위해서 돈을 물쓰듯 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아들의 손에 주셨습니다.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세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1:17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히브리서 1:3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도 있고,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머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로 그 아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아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 다시 말해서 의지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은 그냥 진노 가운데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집으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28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억지로 멀쩡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냥 그 고집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분명하게 우리 인생의 결말을 선언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의지적으로 거역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결코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성경은 지속적으로 두 그룹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양이 있는가 하면 저주받을 염소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워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따라 이 세상 사람들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진노 아래 있을 것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기를 참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이것으로 제 설교를 마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경고의 말씀을 가볍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그 위에 머무를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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