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이세라 | ||
조회수 | 923 | ||
작성일 | 2016-02-07 12:01:19 |
어느 곳에서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살라 |
어느 곳에서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살라(열왕기상 18:1-19)
오달수라는 영화배우가 있습니다. 최근에 이 분이 출연한 영화의 관객 수가 1억을 넘었다고 합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공식 집계로 인정한 것입니다. 인구가 5000만에 불과한 나라에서 한 배우가 1억의 관객을 모았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주로 주연이 아닌 조연을 맡아 연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주연배우만 주목합니다. 그런데 이 분의 경우는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연기가 탁월하여 감독들마다 이 분을 조연배우로 섭외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영화는 한 두 사람의 주연배우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목받는 주연배우의 그늘에는 수많은 조연배우들이 있습니다.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주연배우 못지않게 조연배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뛰어난 조연배우들이 영화 전반에 포진하여 자기 역할을 감당할 때 그 영화가 살아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주연과 조연이라는 구분도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각자 자신의 맡은 역할을 감당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위대한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는 주연배우처럼 보이는 인물도 있고 조연배우처럼 보이는 인물도 있습니다. 연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2016년 주일예배에서는 주로 신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인물별 강해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2월 달에는 언뜻 보면 주연급 인물이 아닌 조연급 인물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려면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 배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에서도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주인공은 단연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상대역인 아합은 주연급 악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로 살펴보려는 인물은 오바댜라는 사람입니다. 먼저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면 본문에 나오는 오바댜는 소선지서에 나오는 오바댜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여기 나오는 오바댜는 분명히 주연배우가 아닙니다. 그는 아합과 엘리야의 대결 구도에서 조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바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도 이 사람의 모습이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이스라엘의 정세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두 나라로 나누어졌습니다. 두 나라를 비교한다면 북이스라엘이 좀 더 빠르게 세속화되어갔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쉽게 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북이스라엘의 세속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아합입니다. 아합은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아합의 악행의 배경에는 그의 부인 이세벨이 있습니다. 아합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숭배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바알을 위한 제단과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아합을 가리켜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한편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는 그런 아합 정권에 반발하여 아합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선지자입니다. 아합이 이세벨의 영향으로 바알 숭배에 빠지면서 하나님은 비를 내리지 않는 가뭄으로 아합 정권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따라서 아합의 입장에서는 엘리야가 철천지원수였습니다. 물론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아합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원수였습니다. 아무튼 엘리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에는 수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이제 비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제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러 갑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오바댜라는 인물은 그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 말씀은 오바댜의 두 가지 정체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선 오바댜의 직업은 왕궁 맡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왕궁 맡은 자이면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합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아합 밑에 있으면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오바댜는 아합 왕 아래서 왕궁을 맡은 관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직책이 정확히 어떤 역할인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우선 이 직책의 이름은 나중에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근거로 오바댜가 아합 왕 다음으로 높은 직책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합 왕 시대에 이 직책은 단순히 왕궁과 그와 관련된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이 아합 왕 시대에 가장 높은 관리였던 아니면 그 보다는 낮은 관리였든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이 당시 아합왕에게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 보면 당시 아합은 가뭄에 대비하여 물 근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합은 오바댜를 다른 길로 보내면서 물 근원을 찾게 했습니다. 아마 이 사람 외에도 아합에게는 여러 신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 근원을 찾아다니면서 이 사람과 동행하고, 이 사람을 다른 길로 가서 찾아보게 한 것 등을 보면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합왕에에 신임을 받고 있던 관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사람은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4절은 이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는가를 한 사건을 통해 설명해 줍니다. 본문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야훼 신앙을 반대하고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퍼트렸습니다. 그녀는 야훼 신앙을 멸절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 때 오바댜는 백 명의 선지자들을 숨겨주었습니다. 두 개의 굴에 각각 50명씩 숨기고 몰래 떡과 물을 먹였습니다.
아합의 신하로 일하면서 아합의 일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발각된다면 그는 아마 관직을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는 은밀하게 선지자 백 명을 숨겨주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이스라엘은 심각한 가뭄으로 왕까지 나서서 물의 근원을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합니다. 성경은 그런 오바댜의 모습을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오바댜는 대단히 위험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합의 녹을 먹고 있는 아합의 신하입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직업적인 면에서 그의 주인은 분명히 아합입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 존재하는 그의 진정한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지금 두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주 갈등하고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아합의 신하로서 맡은 직책을 그만 두는 것이 낮지 않을까 자주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합니다. 자신의 직책을 활용하여 죽음의 위협에 처한 선지자들을 백 명이나 구했습니다. 비록 엘리야처럼 완전히 아합을 대적하면서 살지는 못하지만 그도 역시 자신의 위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 사람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물의 근원을 찾아 홀로 길을 가다가 엘리야를 만납니다. 아합은 이미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엘리야에 대해 지명수배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엘리야가 오바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말합니다.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 그 동안 아합은 엘리야를 찾기 위해 온 나라를 뒤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가 제 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엘리야의 말에 이렇게 반박합니다. “만약 내가 아합에게 당신을 보았다고 말했다가 당신이 사라져 버리면 나는 아합에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이제 오바댜는 아합에게 가서 그 사실을 전합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서 드디어 엘리야를 만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 말은 지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바로 엘리야 때문이라는 말투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 말에 대해 이렇게 반복합니다. 본문 1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엘리야는 아합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괴롭게 하고 있다고 반박합니다.
여기서 괴롭게 한다는 말은 원어의 본래 의미에 비하면 좀 약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본래 의미는 이스라엘을 해롭게 하기 위해 악한 초자연적 세력과 더불어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런 악한 역할을 하는 자는 바로 아합입니다. 아합이야말로 악한 세력과 연대하여 이스라엘을 해롭게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합의 바알숭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비를 주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중대한 영적인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바알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농사와 풍요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은 광야의 신이고, 전쟁의 신이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광야의 신인 여호와를 버리고 농사와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겨라”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농사와 풍요의 신인 바알이 비를 준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알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음란한 문화를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의 신전에서는 여자 사제와 남자 신도들 간에 집단 난교가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기야 아합 왕은 이세벨이라는 이방의 공주와 결혼하고 정책적으로 바알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바알을 농사의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땅에 비를 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지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아합의 바알 숭배 때문입니다. 바알을 신으로 숭배하는 자들에게 누가 참 신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땅에 가뭄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저 유명한 갈멜산 전투를 제안합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드디어 갈멜산의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엘리야가 승리하는 모습, 그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가뭄이 그친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모든 일을 중간에서 주선한 자가 바로 오바댜입니다.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아합의 신하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자신의 자리에 머물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고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어느 주석가는 그런 오바댜를 보고 나쁜 자리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오바댜가 몸담고 있는 자리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아합 왕 밑에서 신하로 일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은 아합의 충견 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아합과 이세벨이 시키는 대로 선지자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아합 왕의 신하로 있었지만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주인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죽일 때 선지자들을 백 명이나 숨겨주었습니다. 또한 아합과 엘리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지속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장 탁월한 본으로 삼아야 할 인물은 오바댜가 아니라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사악한 왕 아합에 맞섰습니다. 엘리야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선지자가 되어 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엘리야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처럼 자기 직업을 다 버리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물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직업을 버리고 전임사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례요한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세리들이 나아와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침례요한은 세리의 직업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과된 세금 이외의 것을 거두지 말고 정직하게 일하라고 권했습니다. 군인들도 나아와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침례요한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군대 귀신들렸던 자는 귀신이 나가고 정신이 온전하게 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이 사람도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너를 고쳤는가를 가족들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로 사는 것은 분명히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엘리야처럼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오바댜처럼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오바댜처럼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신학교에 가면 마음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들을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불의한 일을 지시받거나 부조리한 일을 요구받을 때면 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물론 누군가는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목회자가 되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로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 좋지 않은 자리에 머물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 많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모든 사람을 엘리야처럼 부르지 않으십니까? 왜 주님은 모든 사람을 12제자처럼 부르지 않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포지션에서 어떤 타이틀을 갖고 사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바댜는 직업적인 면에서는 아합을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향하여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였습니다. 아합의 신하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예 가능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맡은 역할은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저와 같이 전임목회자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 자리에서 주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