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박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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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1-06 12:56:36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길이요(요한복음 14:1-6)

 

  요즘 계속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곱 가지로 소개하셨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4) 나는 선한 목자다(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오늘은 그 중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혼돈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은 참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을 살다 보면 선한 사람이 무고한 희생을 당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런 일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불안과 염려라는 질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염려하며 삽니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갑자기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고 따르던 지도자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크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3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혼란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합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혼란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직업까지 다 버리고 3년간 스승을 따라다녔는데, 그 스승이 갑자기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큰 근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기서 근심한다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 예수님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이 단어는 반드시 근심한다는 뜻으로만 번역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심하다, 라는 뜻 외에도 비통하다, 괴로워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7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가룟 유다의 배반과 관련하여 또 나옵니다. 요한복음 13:21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도 친히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친히 고통을 겪어보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이런 심령의 고통을 경험하셔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친히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 가운데 가장 심각한 고통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이 친히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말 번역을 보면 마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를 믿으라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나를 믿으라.”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도 우리가 믿을 대상입니다. 근심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것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까? 본문 2-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음에 대해 근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가서 우리가 거할 곳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거처할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놓은 후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접하여 예수님이 계신 아버지의 집에 함께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언제 예수님은 먼저 가시며 언제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까? 여기서 먼저 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계시던 천국으로 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오십니까? 여기서 다시 온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우리가 거할 곳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할 곳을 준비하면 다시 우리에게로 오실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면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의 재림 때 이 모든 것이 완성된다면 지금 현재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천국을 최종적으로 완성된 천국으로 제시합니다. 그 전까지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천국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천국에 거하는 자들은 아직 육체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천국에 거하지만 성경은 항상 최종적인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 육체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의 근원을 따져보면 결국 대부분 죽음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거할 곳을 다 예비해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 이제 모든 의문이 풀린 것 같은데 아직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그 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본문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그 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알겠습니까?” 도마는 둘 다 모르겠다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도 모르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겠다고 질문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의 신학을 담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담긴 깊은 의미를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 가지, 곧 길과 진리와 생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로 나오는 길입니다. 단순히 제일 처음에 나오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세 가지 중에서 길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도마의 질문이 바로 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에게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답변하시면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가지, 곧 진리와 생명은 무슨 역할을 할깨요? 진리와 생명은 왜 예수님이 길인가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왜 예수님이 길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진리와 생명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진리일까요?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은 요한복음 1:14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었으니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으니 그 분 안에는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 분은 진리를 보여주거나 가르쳐주는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입니다.

 

  이제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일까요?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입니다. 요한복음 1:2-3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진술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대행자입니다. 창조된 것 가운데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생명이 충만합니다. 요한복음 1:4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은 계속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5:26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자신이 생명임을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동시에 생명의 완성이십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셨고, 타락한 이후에는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영국의 신학자 프레드릭 피비 브루스(Frederick Fyvie Bruc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성육신하셨다.” 진리와 생명이 예수라는 인간으로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우리를 안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 자신이 바로 길입니다. 오직 그 분을 통해서만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장차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만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된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유일하신 길이라고 말하면서 막상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유일하신 길이라면 그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곧 진리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 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아닌 영광의 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그 길은 넓은 길이며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셨건만 우리는 여전히 그 영광의 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된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온전히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믿을 대상을 찾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믿습니다. 돈을 신뢰합니다. 예수님보다는 돈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실속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진리로 여기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그 안에 살아야 그 생명을 누릴 것 아닙니까? 예수님 안에 산다는 것은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가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그 안에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부패했다는 오명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주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잘 찾아보면 우리 보다 더 타락한 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 오명을 듣고 있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저를 포함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길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진리라고 부르면서도 그를 온전히 믿지 않고,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안에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픈 이야기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의 죄가 너무 큽니다. 성도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본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많은 목회자들이 부정적인 본만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에게 참으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현실을 원망하고 절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8-19장에는 엘리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에게 강력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아합이 바알신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그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그들과 엘리야가 각각 제사를 드려서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잡아 놓고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엘리야가 송아지를 잡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여호와의 불이 임하여 제물을 태운 것은 물론이고 도랑에 부은 물까지 모조로 다 마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고 인정합니다. 엘리야는 백성들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입니다. 아무 권력도 없는 엘리야가 왕의 힘을 의지하고 있는 바알 선지자들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아합의 부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지명수배령을 내립니다. 그 일로 엘리야는 깊은 두려움에 빠져 홀로 광야로 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청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들이 다 죽고 자신만 혼자 남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야는 힘을 내어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자신의 뒤를 이어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엘리사를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 이야기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타락하고 목회자들이 타락하면 마치 이 세상에 좋은 교회는 하나도 없고, 신실한 목회자들도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땅 곳곳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유일하신 길로 알고 그 길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참 진리로 알고 오직 그만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참 생명으로 알고 오직 그 분 안에서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절망하고 원망하지 말고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다시 힘과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믿음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소망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유일하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 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음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를 따르십시오. 그를 믿으십시오. 그 안에 사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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