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준화
조회수 477
작성일 2017-06-01 17:40:28
가족, 종말론적 신앙의 동반자

가족, 종말론적 신앙의 동반자(골로새서 3:20-21; 베드로전서 3:1-7)

     

  5월은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어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릅니다. 첫 주가 어린이주일이고, 둘째 주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린이주일이었던 지난주에는 헌아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번 주는 어버이주일이라서 교회에서 어르신들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가정의 달에 맞추어 가족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를 한꺼번에 다루려고 합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살펴보고 그 다음에 부부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를 향한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20-21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먼저 자녀들에게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시면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문자적으로 부모가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에서 모든 일에 순종하라는 것은 어떤 일을 시키든지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순종하라는 말은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지 않는 부모가 죄악된 일을 지시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순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그리스도인 자녀들은 부모에게 완전한 순종을 드려서 주 안에서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길렀는지 깊이 생각한다면 순종하지 않을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중에서 어린 자녀를 기르는 엄마들은 제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기르다가 낳으면 밤낮으로 젖을 먹이며 기릅니다. 왜 아기들은 꼭 밤에 우는지, 졸리면 자면 되는데 왜 안자고 우는지 초보 엄마 아빠들은 당황하면서 아이를 기릅니다. 그런 세월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마땅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5-10계명은 인간간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런데 제5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인간 간의 관계를 다룬 계명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다음에 놀라운 약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출애굽기 20:12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의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공동체적인 축복을 가리킵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회가 안정된 사회가 되어 번영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반드시 장수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장수의 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모 공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힘껏 효도하십시오. 부모님이 떠난 후 다 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제 아비들에게 주신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비들에게 주신 명령은 단순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에 자녀들은 크게 상처를 받고 노여워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런 폭언과 폭행을 하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조건적인 관용을 베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즈음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훈육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여 자녀들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절대로 자녀를 자유방임형으로 키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자녀들이 낙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비들에게 이 말씀을 주었을까요? 당시는 주로 아비들이 자녀를 훈육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아버지는 엄하게 자식을 교육시켰고, 어머니는 자상하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또한 아버지들은 자녀에 대해서 엄청난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말씀은 자녀에게 권세를 남용하지 말라고 아버지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자녀를 잠시 맡아서 그가 잘 성장하도록 돕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주셨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믿고 이토록 귀한 자녀들을 맡겨주셨단 말입니까?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고 존중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의 신앙을 계승할 자로 존귀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 자녀들의 입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내 아버지의 하나님, 이제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부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도 부부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제가 여러 차례 그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난주 수요일 마태복음 강해 시간에 이 말씀을 인용하여 간단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요.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부부를 향하여 주신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1을 보면 부부 가운데 먼저 아내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아내들에게 주신 계명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어떤 권위 아래에 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 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남편들은 종종 이 말씀을 남용하였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남편들은 이 말씀을 이용하여 아내들을 위협하고 자신들의 권리 남용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알려면 당시의 배경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먼저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유대사회는 가부장적 사회라서 여성들의 역할과 기능을 상당히 제한하였습니다. 성경배경연구의 전문가인 벤 위더링턴은 당시 사회는 크게 네 가지 차원에서 여성들의 권한을 제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네 가지는 상속권, 결혼을 비롯한 관계를 선택할 권리, 종교교육의 권리, 이주의 자유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당시 유대 사회는 여성의 권한을 여러 면으로 상당히 제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유대 사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다만 이들의 여건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여성들은 유대 여성과 비슷한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곧 지금의 터키 지역의 여성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성들도 개인사업을 하기도 했고, 공직에 몸을 담기도 했고, 종교단체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로마사회는 여성에게 투표권과 재산권을 허용하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여성들은 또한 교육 받을 기회를 더 많이 얻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소아시아의 여성들의 상황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베드로가 아내들에게 순종을 권면한 것은 여성이 열등하기 때문에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권면에는 매우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여성들이 유대사회의 여성들보다는 더 나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대사회는 어디나 기본적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아내는 자동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아내가 먼저 믿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내에게 자상하지 않은 이교도 남편들은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으면 결혼관계를 파기하겠다고 아내를 위협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이 권면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현명한 처신을 하라는 뜻입니다. 

     

  1절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이렇게 명령한 후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는 지금 주로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현명한 처신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비결은 아내의 말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수다와 잔소리를 통하여 남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내의 선한 행실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내들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을 전도하려면 아내들은 어떤 행실을 보여야 합니까? 본문 2절을 보면 남편들은 아내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본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결한 행실이란 도덕적으로 정결한 행실을 가리킵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적으로 정결한 모습으로 사는지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적으로 정결한 아내의 모습은 그 자체로 남편에게 얼마나 설득력있는 설교가 되겠습니까?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아내가 어떤 행실을 보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절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4절에는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사도 베드로는 먼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일, 곧 외모를 가꾸는 것으로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사회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은 머리는 예쁘게 땋고, 머리 위에는 온갖 금으로 장식하고, 값비싼 옷을 입은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여성들은 지나치게 외적인 장식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들은 금장식을 끼워서 머리를 땋아 올리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의 수신자들 가운데도 그런 여성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외모를 가꾸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머리를 땋으면 안 되고 장식도 일절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가치의 비교로 해석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일은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면을 가꾸어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제 베드로는 썩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가꾸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인격이 잘 통제된 것을 가리킵니다. 안정하다는 것은 고요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란 심술궂은 불평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내들이 자꾸 남편에게 불평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불평 때문에 그들의 남편이 아내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을 중단하고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 되도록 자신을 가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삶을 실제로 산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제 베드로는 이 권면이 단순히 이론적인 권면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꼭 필요한 권면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본문 5-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5.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이제 베드로의 권면은 믿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산 부녀들을 과거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거룩한 부녀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중에 사라를 대표로 언급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존대말을 사용하는 정도에 해당됩니다. 그렇게 남편을 존중했다는 말입니다. 사라는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6절의 하반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여기서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믿지 않는 남편의 박해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에게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박해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예수 믿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거룩한 행실로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 남편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믿는 아내는 남편에게 선을 행해야 하지만 남편이 위협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거룩한 그리스도인 여성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눈물로 기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만 주님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방탕한 남편도 죽기 직전에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극진히 아버지를 섬기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거스틴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후에 그의 유명한 저서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모시기를 마치 주님을 모시듯 하였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런 경건한 태도가 깊은 감동을 주어서 결국 그녀의 방탕한 남편도, 아들도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여러분가운데 남편이 믿지 않거나 혹은 믿음이 약하여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은 결코 여러분의 어떤 말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의 신실한 신앙과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통해서 남편이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잔소리를 줄이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해 보십시오. 그런 여러분의 헌신적인 태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남편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믿는 남편을 둔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말로 남편의 신앙을 세워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결하게 사는 삶을 통해서만 여러분의 남편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신앙을 두고 온유한 태도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가꾸십시오. 온유하고 안정된 태도로 남편을 대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남편들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남편들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7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남편들의 아내들은 주로 믿는 아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향한 권고와는 약간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내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한 남자가 양과 가축과 아내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므로 남편의 의무는 단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부부의 개념이 혁명적으로 바뀝니다. 남자나 여자의 차이가 없이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남편에게 충실해야 한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인 남편들도 아내를 향해 동일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먼저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권고합니다.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은 아내를 향한 이해심을 가지고 동거하라는 말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성적인 측면에서나 정서적인 측면에서나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편들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사실 남성들의 입장에서 여성의 심정을 잘 헤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배우겠다는 마음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물론 남편도 약한 그릇입니다. 그렇지만 아내가 더욱 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더 연약한 존재로 알고 이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또한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여기서 귀히 여기라는 말은 존경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태도로 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동료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아내를 신앙의 동반자로 여기고 존중하며 사십시오. 아무 이유 없이도 아내를 존중해야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내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존중하고 아내와 좋은 관계 가운데 지내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막힙니다. 기도가 막히면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기가 어려워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제도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 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둘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만 배우자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곁에 있는 배우자는 신앙의 동지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이르는 이 순례길의 동반자입니다. 저와 제 아내는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키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혼 초기에 저는 일반적이고 아내는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부가 어느덧 은혼식을 맞이하였습니다.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 세상의 반은 아내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내와 저는 서로 다른 독립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오히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존재로, 서로를 상보적 관계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내 인생의 동반자요, 신앙의 동행자요, 신학의 대화자요, 목회의 동역자입니다.” 아마 제 아내의 고백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동반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이 순례의 길에서 서로 격려하면서 끝까지 이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여러분의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하십시오. 함께 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축복입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부부관계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배우자는 그 영원한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허락하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함께 사는 동안 그 선물을 충분히 누리십시오. 인생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의 인생의 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날을 선물로 여기며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를 이 종말론적 신앙의 여정에 축복된 동반자로 여기며 서로를 즐거워하며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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